복음을 영화롭게!

17과 죽음의 바다와 구원의 방주

동산지기(최종덕) 2006. 8. 26. 15:56
 

17과 죽음의 바다와 구원의 방주(창6:1-22)

에이즈에 감염된 어떤 젊은 여성이 절망하다가 자신에게 에이즈 균을 옮긴 남성을 증오하면서 보복하려는 생각에 여러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나만 죽을 수 없다고 악을 쓰는 모습이 사단의 발악과 다르지 않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죄의 끝은 죽이고 파괴하며 자멸하는 것으로 죄악이 세상에 관영했다는 말은 스스로 자멸할 세상이라는 말이다.


흔히 홍수심판으로 부르는 노아방주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기보다는 자멸할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를 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이다. 그냥 두면 죽을 사람들에게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 어찌 심판이라고 하겠는가?


☞ 죄가 관영한 세상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무슨 큰 죄악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3절에서 말하는 인간의 실체이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육체가 됨이라”는 구절은 ‘육체이므로 죄를 지었다’ 는 말이다. 죄의 생명이 되어버린 인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죄를 짓는 것 밖에 없다.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자기들의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자신들의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의미이다.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것이다. 자기가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행복이다.


☞ 노아를 부르시는 하나님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행위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식에 동의하며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를 말한다. 노아가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여호와께 은혜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눈 속에 있는 은총을 발견했다’는 의미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을 이해하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열정에 적극 참여했음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에녹이 하나님과 삼백년을 동행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라고 하신 방주에는 방향키나 젓는 노가 없다. 이처럼 구원사역에서 인간의 몫이란 없다. 구원을 위한 방주는 인간의 고안이나 디자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이어야 하느냐고 따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 이것밖에 없을뿐더러(행4:12) 하나님에게도 인간의 죄사함을 위해서는 아들을 대신 내어주는 것 외에는 달리 길이 없으셨다. 복음은 철저하게 하나님만의 마음에서 나온 작품이며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불완전해 보이는 방주이지만 하나님이 설계하신 방주는 가장 완벽하게 설계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복음은 완전하다. 완전한 복음이기에 가감할 무엇은 없다. 오직 십자가!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있음을 인정하고 완전한 복음에 온전한 믿음으로 반응하자!


노아의 방주! 그것은 육체가 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이며 죽음의 바다에서 살아남는 생명선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방주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속에 있는 은총을 발견하고 그를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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