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입성을 맞아
준비된 의전이라고는
사람을 태워 본적이 없는 나귀새끼였다.
길이 여는 소리도
호령하는 소리도 없으며
호위하는 무사나
높이 쳐들은 깃발도 없었다.
겉옷을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연호하는 군중들이 전부이지만
그 또한 자신의 겉옷을
욕망의 보자기로 펴고 있을 뿐이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그러나 이들의 이 외침마저도
자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성난 군중의 소리로 돌변해버린다.
그러기에 예수를 향해
정복자 다윗이 되어달라고 환호하는 소리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길을 재촉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다윗이 베옷으로 갈아입고
주의 법궤를 모시던 날,
영광의 왕을 선포하던
그 날의 환호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소리였다.
예루살렘 성전,
곧 주님 자신의 집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나오셨던 주님...
그곳은 이미
거룩하신 주님이 계시기에는
너무나 낡고 추한 곳이 되어 있었다.
건물과 모양이 있고
분주한 소리가 있어도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충성과 헌신은 찾아볼 수 없는 성전...
주께서 돌아서신 성전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라면...
그것은 최고의 비극이며 수치이다.
기도하는 내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노라고
탄식하는 주님 앞에
오늘 우리의 교회는 관계가 없는가?
날마다 같은 질문을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젖어도 너무 젖은 우리이다.
호산나를 외치기 전에
나의 성전은 낡지 않았는지
그 외침은 정당한 것인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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