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고 있는 룻기는
9회말에 터진 역전 홈런 같고
따스함이 깃든 한편의 동화와도 같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있고
조건 없는 섬김과 헌신이 있으며
모든 눈물을 닦아낼만한 완전한 안식이 있다.
단순히 가족애를 말하거나
나그네를 선대하는 수준의 의가 아니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구속의 이야기이다.
한꺼번에 찾아온 슬픔과 절망...
그리고 죽음의 행렬에 서 있는 사람들,
곧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 뒤에 남겨진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이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희락의 이름을 가졌으나
그 존재는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
나오미의 슬픔은 가장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이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고통하고
사망에 종노릇하며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완전한 절망 속에 신음하던 이 가정에
한줄기 빛처럼 소망이 찾아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속자를 만나면서이다.
모세율법에 명시되고 이스라엘이 전통처럼 지켜온
고엘 제도는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도록
가까운 친족이나 지인들에게 구속자의 의무와 권리를 주었고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구속자로 등장하고 있다.
보아스는 모압여자인 룻에게 인애를 베풀었고
룻은 보아스에게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았다.
사실 나오미에게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서
그의 결정여부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신발을 벗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친족은
더 가까운 친족이라는 이유로 우선권이 주어졌으나
손익을 따지다가 구속자가 되기를 거절하였다.
거절당하는 나오미와 룻...
이는 그 사람의 악함을 고발하는 것보다
값없이 베푸는 구속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십자가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서 그만한 가치를 발견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주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룻이 아들을 낳고 나오미는 아들을 안았다.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웃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했다.
사망에 자리에서 절망하던 여인이 생명을 안았다.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이처럼 룻기는 사망에 있던 자들이
구속자로 말미암아 생명을 안고
슬픔과 절망에 있던 자들이 기뻐하고 찬송케 되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그 후손으로 태어나는 다윗에게로 모아진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모든 인류의 구속자 예수를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구속자가 있다는 것!!
이보다 더한 찬송의 이유가 있을까?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 하셨도다!”(룻4:14)
'동산지기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 (0) | 2008.05.06 |
---|---|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변화 (0) | 2008.05.05 |
주님이 하십니다. (0) | 2008.04.29 |
왕이 없는 세대 (0) | 2008.04.28 |
족보 속에 숨겨진 아버지 마음 (0) | 2008.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