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은 말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위협하는 권세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말하는 저들은
처음부터 용기백배했던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에는
변명하고 도망했던 사람들이었고,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의심의 눈동자와 슬픔의 표정을 지었으며
두려움으로 인하여 문을 닫았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입니다.
권세자의 위협에 물러서지 않고
돌을 던지는 자들을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에서
저들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겠지요.
“보고 들은 것의 증인”
어느 곳을 향해 가든지, 누구 앞에 서든지
그들이 한결같이 유지했던 자세입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를 목격하고
부활의 소문을 들은 이들이
모두 증인으로 살아간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보고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저들의 변화를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
이는 단순히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증인으로 세우신 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들은 것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부활의 사건과
그 이후의 몇몇 사실들을 살펴보면
주님께서 저들을 증인으로 세우시기 위해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셨는지,
또한 증인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경험해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지요.
몇 가지의 예를 들자면,
부활하신 몸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음에도
굳이 무덤 문을 열어 두신 것은
그곳을 찾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자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시고 확인시켜 주신 것이나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일들은
부활의 사실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분명케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확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의미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5-48)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못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는 것과,
죄사함을 얻게 하는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질 것을
저들의 마음을 열어 가르치신 주님은
그들에게 증인의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주님은 무덤의 돌문만 아니라
굳어진 마음의 문을 여시며
믿음의 눈을 여시고 증인이라 하신 것입니다.
증인...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말꾼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신한 것을
그의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증인이라 여기며
수많은 말들을 옮겨놓던 날들이 부끄러워집니다.
성령께서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보는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