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스크랩] 천국, 지옥 간증 무엇이 문제인가?

동산지기(최종덕) 2010. 11. 13. 12:07

 

 

 

천국, 지옥간증 무엇이 문제인가 (2)
- 구순연 집사 간증집회를 중심으로

 

전정희
현대종교 기자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호에는 자칭‘천국과 지옥전도간증 강사’구순연 씨의 입신 배경과 그가 봤다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간증의 영향을 간략히 정리했다. 그러나 지금도 목회적인 필요성(?)과 맞물려 비성경적인 천국지옥 간증자는 의식 없는 교계 일간지와 TV를 통해 활동영역을 넓혀 가는 게 사실이다.

이 같은 비성경적 간증에 대해 전주 효성교회(예장 합동) 윤희원 목사(총회신학위원회 이단조사연구위원, 현대종교 편집위원)는“이러한 간증이 목회현장에서 절실히 필요하다는 현실이 부끄럽고, 목회적 현실의 욕구 때문에 비성경적 간증을 강단에 쉽게 세워 듣게 하는 목회자들의 처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구미가 당긴다는 솔직한 소감을 지울 수 없다”면서“왜냐하면 이런 내용의 간증을 듣고 교인들이 변화되어서 새벽기도 잘하고, 십일조 생활도 잘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게 된다면 마다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것은 우리 모두가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인데, 그런 천국에 대해서 우리의 신앙생활과 접목하여 전해 준다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구순연 같은 강사를 한 시간 세워서 평생 편한(?) 목회, 대접받는(?) 목회자가 된다면 굳이 싫다고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도 솔직히 들었다”고 속마음을 표현했다.

더욱이“이런 목회적 욕구 때문에 이 간증이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간증 강사로 초청하여 얼마의 강사료를 주고 잘만하면 엄청나게 남는 이득을 가질 수 있기에 문제점이 있는데도 세우며, 또한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도 계속적으로 세울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구순연 집사의 간증을 들으면서‘그런 천국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윤 목사의 다음과 같은 분석을 통해 문제점과 대안을 생각해 보며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구순연 집사는 육체가 이탈되어 천사에게 이끌려 천국에 가는데, 어느 공간에 빠져 올라가니 요단강물이 보였고, 거기서 목욕하고 세마포를 입었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어렸을 때 필자가 초등학교도 다니기전에 찬송가 291장“날 빛보다 더 밝은 천국”을 부르면서 가졌던 느낌을 기억나게 한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가 곡조 때문에 요단강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나님이 사는 천국 그 사이에 흐르는 강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요단강은 이스라엘에 흐르고 있는 강이었고, 광야에서 가나안(낙원)으로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간 강이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허탈해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있는 요단강이 실제 천국에 가는 길목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앤 베리 율라노프(Ann. Barry Uronov)는『종교와 무의식』(한국심리치료연구소 간, 이재호 역)이라는 책에서“상징세계는 정신세계와 종교경험의 세계를 연결시켜준다”고 이야기한다. 구순연 집사는 요단강이란 찬송가의 상징모티브를 실제적으로 이해했고, 그 실재적 이해가 결국은 천국에서 흐르는 강으로 이야기한다. 천국 간증을 하는 여러 사람들의 간증을 들으면 생명강가가 언급되는데 구순연 집사는 요단강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정말 천국에는 이스라엘 땅에 흐르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둘째, 교회의 성가대에 앉아야만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보좌 옆 성가대에 앉을 수 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한다. 성가대에 앉는 것이 얼마나 특권인가를 알려주고 교회 안에서 더 충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뭐 나쁘겠느냐만은 솔직히 천국에서 지상교회의 직위나 직분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라면 나는 그런 천국에는 가고 싶지 않다. 천국은 새 질서요, 새로운 세계인데 지상의 교회에서 성가대 했다고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 보좌 옆 성가대 석에 앉아서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면 어찌 천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셋째, 죽은 남편을 천국에서 만났는데 남편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데 가는 길이 다 꽃길이고, 꽃이 말을 하고, 물고기가 말하고, 새도 말하고, 짐승도 말하고...
에덴동산에 나귀를 타고 자기가 가는데 나귀가“기쁘다 구주 오셨네”찬양을 했다고 한다. 구순연 집사는 천국에도 자기 집이 있고, 내가 내 집을 소유하고 사는 곳으로 이야기하며 자기 남편의 집은 에머랄드, 비취, 다이아몬드가 벽에 아름답게 박혀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집, 그런 보석 집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구순연집사의 간증은 논리에도 맞지 않고, 일관성도 없다. 왜냐하면 이런 영적 거부(巨富)로 살려면 전도를 많이 해야 하고 전도를 하면 천국의 집 평수가 넓어진다고 희한한 주장을 하기에 그렇다.

그럼 그런 좋은 집에서 사는 남편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구순연 집사의 말대로 하면 그의 남편은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다가 주일날 스키 타러 가서 교통사고로 38일 만에 죽은 사람이다. 이런 남편이 죽어서 천국에 보석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넷째, 천국은 계급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데 천국을 마치 군대 같은 계급사회로 이야기한다. 예수님의 상급(賞給) 교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면류관이 성경에 언급되나, 이는 상급이 아니다. 승리의 개념이다. 즉 면류관은 포상의 개념이 아니라 싸움에서 이긴 승리의 개념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천국에 가면 면류관을 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충성한 성도에게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예비했다가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상급으로 여겨서 면류관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털모자 쓰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을 너무나 모르는 처사이다.

다섯째, 지옥에 대한 간증도 재미있지만 너무나 한국교회 현실의 문제를 접목시키고 있는 느낌이 든다. 목사와 장로가 가는 지옥을 구분하면서 한국교회 목회현장의 문제, 특히 장로들이 목사를 대적하며 교회를 분열시키는 점을 다루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순연 집사의 천국, 지옥 간증은 목사들에게 있어서는 목회적 욕구와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억눌렸던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출하도록 하는 매력(?)이 있기에 인기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국에도 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의 개념이 있고, 물질의 소유가 있고, 그런 것들을 영원토록 누리기 위해서는 죽도록 충성(?)해야하는, 복 받기 위해 행해야 하는 기복신앙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간증들이 계속적으로양산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시장의 법칙이 통하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간증은 사실상 사람만 다르지 강조하는 강조점이 비슷하거나 같다는 점에서 그렇다.

마지막으로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아니하면서 3층천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그 내용과 그 간증을 기록하지 아니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천국이 장소의 개념도 있지만,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장소의 개념보다 관계의 개념으로 천국을 소개했다는 점을 바울은 바르게 이해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천국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또한 잘못된 간증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0-21에서“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다. 이 성경의 말씀을 많이 오해하여“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안에’있다”고 해서 우리는 천국이 우리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심령천국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 하시지 않았다.

‘너희 안에’(엔 토스 휘문)는 사실상‘너희 가운데’로 번역해야 옳다. 즉‘너희들의 관계 속에’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 즉 너와 나의 관계, 우리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토록 이기적으로, 불평등하게,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려낼 수는 없다. 우리 한국교회 목회자나 성도 모두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 정신이 없기에 예수의 삶이 없고, 예수의 삶을 살지 않기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언제나 상상의 세계로, 환상의 세계로 그리며, 간증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천국의 소망을 잊고 망각하면서 살고 있는 세속적인 성도들에게 천국과 지옥 간증자를 세워서 자각을 주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 간증의 내용이 비성경적이며, 비윤리적이고 더욱이 성경 교리에 맞지 아니할 때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 것이 목회윤리며, 목사의 양심이 아니겠는가?

교회 역사에 아가다(Agatha)라는 여성이 있다. 그는 이탈리아 동남쪽 시실리아 섬에 살고 있었다. 이 섬의 총독이 음탕한 마음을 품고 중매쟁이를 보내어 아가다를 유인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가다는 총독의 아내 되기를 거부했다. 화가 난 총독은 아가다를 잡아다가 심문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로마 귀족되기를 싫어하고, 예수의 종이 되고자 하느냐”했을 때 아가다는“로마귀족의 아내보다는 예수의 발 씻기는 종이 좋습니다”라고 대답하고 AD 251년 데시우스(Decius, 249-251)박해시에 2월 5일 시실리아 카타나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이런 신앙 양심, 그런 목회적 윤리를 지킨다면 비성경적인 간증집회는 사라질 것이다.

성공의 개념으로 목회하지 않고, 거룩의 개념으로 목회 한다면 목회자의 목회적 욕구는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고, 영적인 것에 있음이 자명하다. 거룩한 성도, 거룩한 교회는 목회자의 영적 욕구 속에서 유지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 이 시대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주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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