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던 날...
우리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어두움과 절망의 자리에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이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사람을 만드시거나 계획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쫓겨난 자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고 만드시는 일에만 집중하셨습니다.
아담이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분노나 미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돌아올 길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실 필요가 없으셨을 테니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그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는
죄를 가진 존재가 함께 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쫓겨난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심판이며 저주였습니다.
불이 휘발유를 만나면 태워 없애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가진 존재를 삼키고 마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심판인 것을
정확하게 드러낸 때가 있었습니다.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출11:4-5)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는
죄의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저주와 심판이 되고 멸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가 도리어
축복이 되고 구원이 되며 소망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 알리라” (출11:7)
애굽 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똑같이 아담의 생명을 이어받은 죄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의 혈통이 남달라서
심판이 비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별해 내시는 방법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인한 구원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
임마누엘의 축복이 되는 것, 이것이 구별하시는 방법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을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바꾸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 재림의 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절망의 날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은 이들에게는
그 날 역시 소망과 기쁨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영원한 임마누엘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