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과 용서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고 오신
어느 집사님의 표현은 뭔가 찜찜하다는 것이었다.
유괴범에게 살해되어 아들을 잃은 여인이
교회를 다니면서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얻고
급기야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픈 마음에
교도소로 찾아갔는데
이미 그곳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회심한 살인범이
찾아온 여인에게 자신의 자유에 관하여 이야기하자
여인이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어
신을 버리고 급기야 미쳐버린다는 내용이란다.
“내가 아직 너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너를 용서하였단 말인가?“
여인의 당했을 충격이나 고통이 이해되고도 남음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가
기독교에게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기 전이니 전후관계를 알 수가 없어
그 주장에 대하여서는 함구를 하려고 한다.
다만 기독교의 용서에 대한 이해함을 덧붙이고자
어설픈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보면 어떨까?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이
과연 맨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말일까?“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용서는
상대방의 태도나 뉘우침을 전제하는 용서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본을 보이신 용서는
살인자의 뻔뻔스러움에 환멸을 느끼는 용서가 아니다.
얼마 전 터키에서 세 명의 선교사들이
아주 잔인하고 비참하게 살해된 사건을 기억하는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를 꺼내어
칼로 잘라내고, 성기를 도려내고, 항문을 도려내는
끔찍한 이야기가 가족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용서였다.
자신의 남편을 잔인하게 난도질한 이들...
그들의 태도에는 뉘우침이나 후회 따위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먼저 용서를 선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라면 이런 경우에 뭐라고 하셨을까?
저들은 주님께 속한 자로서
주님이 그런 상황이라면 선택하셨을 용서를 말했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이방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의식을 행하라고 요구하면서
사도바울과의 격론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엄격한 율법 교훈아래서 자라난 저들이
이방인이라면 개처럼 여기며 상종을 꺼려했던 유대인에게
저들이 그저 예수만 믿고서도
자신들과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다는 말이 용납되지 않은 것이다.
살인자가 피해자와 동일한 자유를 누리고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살아온 삶의 흔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오직 예수 안에서 동일한 농도의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것...
이성으로 똘똘 뭉친 우리네 사고로서는 이해되지도
쉽게 용납되지도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셨던
예수의 용서를 알고,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용서받을 만해야 용서를 하지’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